안신영(安信永, 1902~1975) 선생님
교육자,
한글(영문)학자,
애국지사,
문학가,
언론인,
음악가,
운동가,
기독교인.
1. 부제학(良恭)공파 후손 칠갑산 정기 받은 백호(白虎)
1902년 : 충남 청양군 진평면 적곡리 북실에서 태어났다. 흰돌 출생가옥이 현존한다.
아버지 순흥인 안석호(安奭鎬, 1874 ~ 1948)와 어머니 경주이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아명 임룡(壬龍), 호 흰돌, 필명 금원(琴園), 별명 안불안 또는 安不安(한글 혼란기 대비).검토에 들어가 약 17년에 걸친 작업 끝에 한글맞춤법통일안 가운데 불필요한 규정을 삭제하고 미비한 규정은 보완하며 현실에 뒤떨어진 규정은 일부 바꿔, 1988년 1월 19일 한글맞춤법을 고시,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1989년 3월부터 시행하였다.
안신영의 선구적 한글연구는 정부안보다 30년 전 1960년에 이미 『한글맞춤법비결』을 저작하였으니 진정한 ‘한글학자’이다.
별명 : 청년기 ‘아씨선생’, 중년기 ‘팔방미인’, 장년기 ‘아버지’.
자녀는 장남 광식(31년 公州生), 둘째 효식(35년 公州生), 셋째 창식(43년 서울), 넷째 성식(48년 서울), 딸 문식(51년 부산) 5남매를 두었다. [2015.05.22일 광식, 창식, 성식이 탐방]
조부는 역과(譯科) 오위장(五衛將) 성재(星齋) 안재건(安載健, 1838무술생)이요, 생가 조부는 관상감판관(觀象監判官) 안재부(安載富)이다. 고조부 청학(淸學)전공 사역원판관(司譯院判官) 안승엽(安承燁)은 외국어의 번역, 통역, 교육을 담당했다.
-안신영의 출생 비화-
“나는 1902(壬寅)년 음 정월 임인(壬寅)이요, 날자는 29일 경인(庚寅)이요, 새벽 인시(戊寅)라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었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해, 달, 날, 때가 모두 ‘호랑이’라는 것이다. 사주(四柱)를 믿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는 것뿐이다”.
“정산의 유명한 칠갑산(七甲山)이 우리 집 뒷산이다. 내가 출생할 당시 칠갑산에는 호랑이가 가끔 나타났다고 한다. 호랑이는 명물이라고 했다. 나는 칠갑산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해서, 더구나 사주가 호랑이라 호랑이와 인연이 깊었나보다”.
“커서 나의 체격, 체질, 체구가 사나운 호랑이가 될 가망은 없게 되었고, 기질만은 호랑이가 됨직 했는데. 모르겠다. 영민한 호랑이가 되었는지…” 『진실에 산다』
-김관회 선생님 영향으로 독립사상 발아-
1908. 6세 : 공주영명학교 소학과 입학하였다.
1910. 8세 :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었을 때 수업시간에 “나라가 망했단다” 하시며 우시던 선생님을 회상한다.
“내가 여덟 살 때에 우리나라가 일본과 합방이 되어 김관회 선생님의 영향으로 나는 육군대장이 되어가지고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이 맹세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는 독립사상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왔다.”『진실에 산다』
1912. 10세 : 공주사립영명학교 고등과에 입학한다.
1913년 이후 : 어느 때부터인가 자훈(箴)을 가슴에 품었다.
『진실에 산다』
안신영 선생이 8년간 영명학교에서 수업할 때 아버지 안석호, 김관회, 이규갑 스승의 영향으로 자주독립사상을 피부로 익혔고, 영명학교에 13년간 재직 당시 윤창석, 안성호, 이묘묵, 박화숙, 황인식, 부인 김영복 교사와 교유한 일은 안신영의 독립운동과 무관하지 않다.『충절의고장 공주지역항일독립운동사』
2. 주시경을 따라 평생 한글 연구
1916. 14세 : 안신영은 서울 배재학당에, 유관순은 이화학당으로 편입학하였다.
1918. 16세 : 서울 배재학당 본과 졸업. 한글 공부는 주시경을 따라 배재에서부터라고 자서전에 전한다.
1927년 25세 : 공주사립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할 즈음 공주에서 ‘한글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8년 26세 : ‘白熊’ 잡지 창간도 그 결과인 셈이다.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공포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언어도 많이 변화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그대로 쓸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1970년부터 본격적인 한글맞춤법
3. 옥살이 두 번에 애국심은 더욱 굳어져
1919. 17세 : 서울 3·1만세시위 참가하였다(형 사영, 둘째형 기영 동참).
1919. 17세 : 4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입학, 4월 7일 기영 형과 헌병대로 끌려갔다.
‘독립만세 부른 것이 잘못되었다’라고 자백하란다. 기영 형은 큰형이 재직한 신흥무관학교 간다고 사전 약속 때문에 거짓 자백하고 곤장 30대로 석방되었다. 나는 끝까지 버티다가 미결수 4개월, 기결수 6개월 감옥살이로 연희전문 수업연한만 길어졌다.
1937. 35세 : 평양경찰서는 안신영을 공주사립영명학교에서 조선어와 조선노래를 가르친 것을 트집 잡아서 ‘조선어 교재 발간’ 등 출판법위반으로 옭아 넣어서 평양에서 금고 3월 집행유예 2년을 언도 받았다. 아우 시영(時永)은 함흥에서 3년, 막내아우 순영(淳永)도 중국관동에서 2년 옥살이 한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하고 학교 졸업 후 평양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체포되어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안신영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대한문(大漢門) 등지에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 1919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 1919년 8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3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 1935년 4월 평양(平壤)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正義女子高等普通學校) 교사로서 창가집 및 한글독본을 출판하여 민족교육을 하였다.
이로 인해 안신영은 다시 체포되어 1938년 7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3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4. 셋 셋 생활 원칙과 민주적인 다양성 교육
1923. 21세 :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졸업하였다.
나는 셋을 좋아한다. 그래서 일찍이 나의 생활원칙 셋 셋을 세워놓고 살았다.『진실에 산다』
1) 첫째 셋
① 사람을 대하여(대인 對人)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 대한다.
② 일을 대하여(대사 對事)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대한다.
③ 물건을 대하여(대물 對物)
모든 물건을 하나님의 소유로 대한다.
2. 둘째 셋
① 바르게 산다.
검은 것을 희다 아니하고, 흰 것을 검다 아니한다.
이해(利害)관계를 앞세우지 않아야 바르게 살 수 있다.
② 부지런하게 산다.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면 성공은 따른다.
게으름은 악과 실패의 근원이다.
③ 검소하게 산다.
맑은 양심과 맑은 생각은 검소에서 출발한다.
모든 죄악은 검소를 떠난 사치에서 출발하는데 사치는 욕심을 낳기 때문이다.
3. 셋째 셋
① 약속을 지킨다.
시간, 금전, 사물에 대한 약속을 지킨다.
약속 엄수는 습관으로 길러지는 것이요 인격도야의 최고수단이다.
② 봉사하는 생활을 즐긴다.
봉사는 기쁨과 행복을 가져온다.
사람은 봉사하러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봉사 없는 곳에 햇빛은 없다.
③ 웃으며 산다.
웃으며 사는 곳에 사랑이 있다.
찡그리는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웃으신다.
위의 셋 셋 원칙은 한민족의 삼신사상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연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모교에 봉직하며, 공부의 비결 제시, 학생의 인격 존중-
1923년 21세 : 서울에서 먼 공주 모교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과, 역사과를 담당하였다.
학창시절에 아버지(安奭鎬)와 자형(尹聲烈)의 근무지요, 그리고 형 둘과 제씨와 자신의 모교, 특히 애국사상을 심어주신 선생님들(김관회 외)이 그리워서 모교를 택한 셈이다. 또한 농촌계몽에도 뜻이 있었다.
영명학교는 남·녀학교가 별개로 운영되었지만 운동회는 산성공원에서 합동으로 열었다. 당시 운동회의 끝 프로그램에 남·녀학교 교사 대항 500m 경주가 있을 때마다 매번 패했다는데, 금년에는 내가 뛰면서 작전상 여학교 선생을 따라 가기로 하고 200m 남겨놓고 질주하여 남학교가 1, 2 등을 걸머쥐니 산성공원이 떠나갈 듯하였고, 내 생애 가장 기분 좋은 선물 이었다고 회고한다.『진실에 산다』
-공부의 비결을 안내한다-
① 학과목담당 선생의 강의를 잘 들으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
② 학과목에 취미를 붙이면 자신의 소질과 특기도 살릴 수 있다.
-교육자는 학생을 위하여 있다-
①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② 어떻게 하면 실수를 고쳐줄 수 있을까?
③ 어떻게 하면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이 될까?
④ 어떻게 하면 스스로 사람이 되게 해 줄 수 있을까?
⑤ 어떻게 하면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할까?
-나는 선생의 허세가 싫어-
위신과 권위에 대하여 남다른 생각을 하며, 학생들이 세워주는 권위와 위신이 진정한 것이다. 나는 교사의 권위보다는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였다. 학과 시간은 엄격했으나 과외 활동에는 학생들의 친구 노릇을 하였다.
1923년 9월 12일 : [동아일보]에 9월 7일 민립대학취지선전강연회가 우중에도 성황을 이루었다며 2·8독립선언 윤창석 등의 연제와 연사가 밝혀졌다. 쉴 틈 없이 공주(충남)의 개화를 외치는 안신영 선생님이 코넷연주로 테이프를 끊었다.
1923년 9월 29일 [동아일보]에 의하면 이미 25일부터 영명영어야학강습 생도를 모집하고 있었다. 강사는 우리암 선교사, 우애리시 여사, 방은두 선교사, 윤창석 교사, 안신영 교사 이다.
야학운동은 “선 실력양성 후 독립”을 표방한 준비론적인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실력양성운동 일환으로 전개된 야학운동은 문화계몽운동의 주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1925년 10월 1일 23세 : 공주영명학교대강당에서 공주영명학생기독청년회주최 소년소녀동화대회가 성황을 이루었다. 안신영씨의 ‘장생불로도’ 등 여러 가지 여흥도 많이 있었다.
[소년동아일보]
1929. 3월 21일 27세 : 공주체육회발기에 참여하여 창립총회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동아일보]
1933. 31세 : 공주 영명여학교 교감으로 전임되었다(역사, 지리, 영어, 음악과 담당).
문과출신으로 국어과 담당 외에 평소 자신 있는 영어, 집안 내력인 음악, 취향을 살린 연극, 기능을 소지한 체육 등 다양성을 발휘하였다. 특히 민주주의와 정신교육을 중시하였다.
-공주시민들의 특별한 송별회-
1935. 4. 15. 33세 : 평양정의여고 전임, 안신영씨 송별 음악과 축구로.
<공주> 공주에서 음악선생이며 운동가이신 안신영씨는 공주영명학교에서 13년간을 하루같이 있으면서 공주 운동계와 음악계의 개척에 공적이 많아 공주 상반정 공제의원 내에서 유지가 화합하여 송별회를 개최한다. 송별음악회와 송별축구대회 일시와 장소는 추후 발표하기로 하였다 하더라. [동아일보]
1981년 4월 4일 : 나의 교유록(이철경)에 신뢰와 존경으로 대하였던 ‘인상 깊은 동료교사’란에서 서무를 겸직한 영어선생 안신영과 고몽혜 선생을 소개하고 있다.
돌아가신지 5-6년 후의 회고록이다. 평양정의여학교 재직 때(1938년)에 다재다예, 외유내강한 성품이 마음을 끌었고, 영어, 음악, 운동도 전문가 이상의 수준급으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다고 흠모한다. [동아일보]
5. 교육 다음으로 전공을 살린 문필 생활과 언론인
-어려서부터 좋아한 옛이야기와 글짓기 수재-
1905년 3세 : 할머니 이야기가 재미있었다고 한다.
1920년 18세 : 학창시절에 ‘연희전문학교 교가’ 현상모집에 당선되었다.(MP3)
한강을 半낫에 안고서 (한강을 반 낮에 안고서)
푸른숲에 깊이싸힌 연희언덕에(푸른 숲에 깊이 싸인 연희언덕에)
우뚝 소슨 집 우리학교일세 (우뚝 솟은 집 우리학교일세)
---이하 생략---
1925년 23세 : 공주영명고등학교 재직 시절에 기독신보(1915년 재한 미국 장로교선교회와 감리교선교회가 연합으로 발간하던 주간신문) 현상 단편소설 부분에 “오늘의 모세”로 당선되어 연재되었다.
1926. 07. 05 24세 : [동아일보] 순회탐방(4) 공주지방대관(1) 교육계 영명여학교와 영명남학교를 방문하면 ‘도출대원, 인성양재(道出大原, 人成良材)’라는 대리석의 초석(礎石)을 볼 수 있다는 기사가 있다.
“도량은 큰 그릇 되게, 사람은 쓸모 있는 재목으로 육성” 즉 영명은 양재를 양성하는 학교라 하였다. 안신영 선생은 이러한 양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클럽활동을 도입하고 연극, 뮤직클럽, 농촌봉사, 문예 잡지를 발간한 셈이다.
공주 영명학창 시절부터 각종성금도 자진하여 납부하였고, 1928년 2월 18일에는 영명학원에
보습과 설치비로 방기순, 성보영 제씨가 적극 활동하였다. 안신영도 김근배, 강윤 등과 같이 각각 100원씩을 기부하였다. 최고 300원부터 5원까지 48명이 협조하였다.
안신영은 부임 때부터 뜬소문이 실화가 되어 1926년 8월 12일 오후 3시 이화여전을 졸업한 교사 김영복과 결혼한다(정동교회, 목사 김종우 주례).[동아일보]
1927.12.09. 25세 : 충남 공주 한글연구회 중심으로 나시영(羅時榮, 공주청년회 원로)씨 외 지난 3일 본정 동춘루에서 찬동자 10여인이 월간잡지 ‘백웅(白熊)’을 신년부터 발행한다더라.[동아일보]
1928. 2월 1일 26세 : 충남 공주(公州)에서 나온 문학동인지 ‘백웅(白熊)’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동인으로는 양고봉(梁孤峯: 在應)·윤파운(尹把雲: 相甲-明齋 종손)·철수(康 喆洙)·철고(鐵鼓: 金鍾國)·진우촌(秦雨村: 宗爀)·엄흥섭(嚴興燮)·운공(雲公: 高雲興)·금원(琴園: 安信永)·박아지(朴芽枝: 一) 등이 참여하였다.
여기 ‘백웅’보다 앞선 문예지 ‘습작시대’, 1927. 2. 발행소가 진종혁(秦宗爀)이 거주하는 인천·용리(龍里) 60 <습작시대사> 이다.
2015년 8월 5일(수)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원
조동길(학술논문, 새국어교육 제96호, 2013) 교수에 의하면 ‘백웅’ 창간호와 2호를 분석한 내용을 종합하여 이 잡지의 의의와 가치를 다음과 같이 주장,
⑴ 기존 학자들의 언급과 달리 동인지가 아니라 순수문예종합 잡지였다는 점,
⑵ 우리 문단 초창기의 사정을 감안해 볼 때 근대문학의 주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
⑶ 공주(충남)의 근대문학 출발 시기를 앞당길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크다는 점,
⑷ 중앙 집중의 문단 현실에서 지역 문학의 거점 내지 균형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근대문학에 대한 관심 자체가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시기에 이런 잡지가 발행될 수 있었던 사실은 공주의 근대를 더욱 풍요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회 문화적 의미가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백웅” 창간호 작품 중에서 시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원(琴園) 작].
흰곰이 낳네! 흰곰이 낳네!
곰나루 언덕 넘어
곰 고을에서
소문도 없이
흰 눈이 내릴 때
흰옷을 두른 흰곰이 낳네!
흰곰아! 흰곰아!
네가 누리에 나오기 전에 어데 있었느냐?
하늘 위에냐! 땅 아래이냐?
아니란다 아니란다
높이 여섯 자 못 되고 너비 자가옷 못 되는
움직이는 것의 마음속이라네
흰곰아! 흰곰아!
귀여운 너를 낳은 이는 누구이냐?
산 넘어 총각이냐? 물 건너 새아씨냐?
아니란다 아니란다
무궁화라는 꽃이 피는 곳에 사는
흰옷을 입은 사람이라네
흰곰아! 흰곰아!
쓰라린 바다에 네가 왜 나왔느냐?
부귀를 얻으러? 공명을 얻으러?
아니란다 아니란다
생의 마음 밭을 갈아주는
쟁기가 되려고 나왔다네.
* 연구자 조동길 교수가 현대말로 교정한 후 편자 박철희가 일부 재수정.
‘금원(안신영)은 이 잡지의 창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물로 추정’함은 아래 글을 살펴보면 확실하다. “백웅”에서 안신영의 필명이 처음 확인된다.
흰돌 안신영은 백의민족의 상징인 ‘흰 돌은 깨끗한 돌이요 순결한 돌이며 살아있는 돌이다’.
‘흰 빛은 찬란한 빛이요 영광의 빛이다’라고 말한다.
흰곰, 흰옷, 흰 눈, 흰말, 흰 용, 흰 코끼리 – 얼마나 고귀한가! 민족혼을 은근히 강조하였다. 『진실에 산다』
1936.10.28. 34세 : 평양음악협회(平壤音樂協會)의 발회식(發會式)이 평양부 화신식당(平壤府 和信食堂)에서 거행된 바, 이날의 위원(委員)과 회원(會員)은 다음과 같다.
平壤音樂協會 組織
平壤音樂協會의 委員과 會員 名單
委員長
權泰浩
常務委員
安信永 金永石 梁堯煥 金聖南
會員
韓永吉 方昌德 鄭達斌 朴裕鉉 李善柱 朴宗賢 田太鴻 李洋鮮 邊承玉 吳天錫 金仁石 全約翰 貴愛多 黃順玉 韓寶偑 李喆卿 李永禮 金明愛 李文姬 李兌榮 崔敬禮 方仁道 朴永德 崔信德
『平壤音樂協會 委員과 會員』
위원장 : 권태호.
상무위원 : 안신영 등 4인.
회원 : 한영길 등 24인 등 모두 29명이다[조선일보].
1941년 04월 07일 39세 : 향토가극(鄕土歌劇, 한국적 오페라) -콩쥐 팥쥐- 안신영 원작(安信永 원작, 安基永 작곡), 서항석 구성(徐恒錫 構成)으로 부민관(府民館)에서 개막되었다.
-내 글은 솔직, 간결, 영어로 Simple Literature 즉 간결 문학-
읽기 쉽고, 읽는 대로 이해할 수 있고, 읽기시작하면 다 읽고야 마는 재미있는 글이다.
즉 ① 쉽게, ② 유익하게, ③ 재미있게 책을 편간하여 가르치는 것이다.
남의 부탁으로 번역(영역)과 편집된 책이 출판된 것만도 다음과 같다.『진실에 산다』
大韓基督敎書會, 1950,
안신영 편(K서061-안59ㅌ)
빌리 그래함 지음, 안신영 옮김,
“행복의 비결”, 백조서점. 1957.
한글맞춤법비결을 비롯하여 통상회의법, /영문법 강해, /알기 쉬운 영작문, /행복의 비결, /무엇을 믿나?, /놓임(극본 Release 번역), /누가 이기나?, /생각해 보세요, /좋은 노래, /즐거운 노래, /어린이 노래 외 /신생사 한영사전 번역 편집, /신약성서 공동번역, /성서주해, /가정생활 설계 등.『진실에 산다』
머리말 : 무엇을 믿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우리가 무엇을 믿나 찾아볼만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나 알아볼만합니다.
이 문제는 믿는 이들에게도 안 믿는 이들에게도 궁금한 문제입니다.
이 책은 남녀 노유 빈부 귀천 누구에게나 착실한 대답입니다.
이 책은 확실히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것을 자신합니다.
심유덕(Miss Simester) 목사 지음. 안신영 옮김, [무엇을 믿나?]. 1958.5.10.
파랑새의행복(여성독본)(백영수 화)-
(문교부납본제1115호.1959년)-안신영
대한기독교계명협회,1959(초판).
웨인 앤더슨 지음, 안신영 옮김,
“가정생활설계”,
새가정 8·9월호(통권 206호), 1972.
1973. 71세 : 낙상으로 병상에서 고통을 이겨내며 자서전(유고)을 남겼다.
1975년 5월 25일 오후 9시 20분 73세로 서울 종로구 견지동 18번지 자택에서 소천 하였다.
금원 안신영의 글은 여기 제시한 것 등 30여 작품이 있으나 다 싣지 못한다.
6. 안신영 선생의 기독교생활
1976. 5. 25. 소천 일주기에 [흰돌 안신영 『진실에 산다』]가 출간되었다.
“내가 70평생을 회고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진실에 산다』 제2부에는 ‘인간은 우스운 존재니라’에 25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인간으로 살면서 소감을 옮기셨다. 또 제3부에서는 믿음의 바탕이 된 성경말씀 중에 금과옥조(金科玉條)에 해당되는 80편을 모아 평전을 곁 드려 읽는 이들에게 유익한 글을 남기셨다. 자서전 전체가 교회에서도 들을 수 없는 설교집이다. 비신자도 읽으면 삶에 크게 도움이 될 명언집이다.
“안신영이 70평생을 회고하면서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나는 어려서 승벽이 대단했다는 것이다. 두 살 위의 기형 형을 이기고야 말았는데, 사실은 내가 이긴 것이 아니라 착한 형이 져주었다고 한다.” 『진실에 산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진실에 살다-
“나는 나면서부터 기독교인이다. 북실에서 기막힌 핍박을 받아 1907년 공주로 이사, 감리교회를 착실하게 다녔다. 1916년에는 서울로 이사, 정동교회를 다니고 1918년부터는 아버지가 담임하는 창내교회의 주일학교와 소년소녀 성가대를 육성하였다”.
“나의 종교생활에서 기적적인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한다면 풍금연주이다. 나는 한 시간도 음악과 풍금을 배운 일이 없다. 다만 옥살이할 때 감방마루에 건반을 그려놓고 화음 4부 연주를 고안하였고, 창내교회에서 반주를 하니 깜작 놀랄 정도라 하였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었다’고 신앙 고백을 하였다.”
“공주에서는 공주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 평양에서는 박구리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 1939년부터 공덕리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 1941년에는 중앙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 그 외 김촌교회를 돕다가 다시 중앙교회로 돌아와 1973년에 은퇴하였다”.『진실에 산다』
1925년 6월 6일자 23세 : 지난 5월 30일에 충남 공주 엡웟(Epworth)청년회 정기총회를 거쳐 임원에 회장 김운각, 부회장 안신영, 서기 이재백 등이 당선되었다.[동아일보]
-나는 교회제도의 혁신이 필요함을 느껴-
공주에서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으려 하지 말고 ‘진리를 찾아내라’고 말하였다가 목사와 크게 충돌한 일이 있다. 나는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하였고, 좋은 성경 구절을 많이 외웠던 것이 내 생활에 아름다움을 주었다. 기도를 생활화 하되 계시와 신유를 믿지만 ‘주관적인 말과 괴성은 사탄의 짓이라’고 회상 한다.『진실에 산다』
1950년 감리교신학교 선생(국어, 여어, 심리학)을 할 때 6·25한국전쟁을 맞아 ‘신학교 선생들이 모두 단체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평신도인 나만 빼놓고 갔다는 것은 수수께끼이지만, 사회는 이런 거다 하고 더 생각 않기로 했다.’고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겼다.『진실에 산다』
7. 나는 이렇게 살았다.
“진실에 산다”를 목표로 성실히 살았다. 등 33가지는 “나의 정신 유산이므로 내 자녀들에게 끼쳐주고 싶은데, 받고 말고는 자유이나 내 양심은 부끄럽지 않음을 밝힌다.”
“나의 영혼(soul), 정신(spirit), 마음(heart)은 무형이다. 유형유산(재산)은 거의 없다. 교육은 가능한데까지 다 시켰다.”
“진정한 승리와 성공과 평화와 행복은 건전한 정신에 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사랑(love)이다. 서로 돕고 서로 믿고 서로 섬기는 생활이 사랑이다.”
“나는 자호를 ‘흰돌’이라 하였는데 1925년 글 현상 모집에서 처음 썼다. 흰돌은 무한 가치가 있어 좋고, 무엇보다도 흰돌은 진실을 상징해서 좋으며, 그러니까 ‘흰돌’은 ‘진실에 산다’의 짧은 말이다.”
“나에게 호칭할 때 ‘안신영 선생’이라고 불러주오.
교장, 총무, 국장, 이사장 등의 직함은 사용할 수도 있지만 ‘안신영 선생’이 제일 좋다.
반면에 내가 아주 싫어하는 칭호는 ‘‘안신영 장로’이다. 나는 1972년부터 교회법으로 장로가 아니다. 말소되었다. 원래 원하지 않았는데 장로를 시켜놓고 그 이름을 빼앗아간 셈이다”.
-퇴임 후 수많은 일(버거운 짐)을 즐겨-
1962년 60세 : 의무 봉직하는 감리회 총리원 사무국총무로 취임하였다.
1965년 63세 : 학교법인 영명학원 운영이사도 6년 동안 역임하였다(1970).
1965년 63세 : 재단법인 기독교방송국 이사로 취임하였다. ‘힘껏 봉사하여 참으로 유쾌했다’고 회고했다.
-내가 참석한 국제회의-
1958.08.15. 56세 : 동남아시아 기독교문서 협의회(일돈 하꼬네, 도꾜).
1965.05.17. 63세 : 세계 계명사업, 기독교문서 연구회(예루살렘).
1967.04.01. 65세 : 국제 출판협의회(미국 Stony Point, New York).
1967.05.20. 65세 : 아시아 문서협의회(필리핀 마닐라).
[당시 내가 창안한 독서구락부(Reading Culb)운동은 동남아시아 회의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매일 30분 독서 30분 평가 하는 제도)].
-투철한 봉사정신으로 신약성경 번역 출판-
1967. 65세 : 재단법인 기독교방송국 국장대리로 취임하였다.
1967년 10월 4일 65세 : <한국기독교의 토착화 발디딤 ; 새 찬송가(순수한 우리찬송가) 24곡 나온다> 김재준·홍현설·안신영 외 작사하고, 박재훈·박태준·나운영 등이 작곡한 찬송가이다.[경향신문]
1967년 대한기독교 교육협회 총무 한영선 목사 추천으로 이태섭의 ‘새로운 어린이 찬송가’ 150장인데, 작사, 작곡의 기명이 전혀 없고, 다만 서문 부분에 장수철·박재훈·김두완·안신영·이태섭이라는 글뿐이다.
1967년 12월 15일에 [새 번역 신약성경]이 출판되었다. 한글고문으로 한갑수, 문장위원으로 전영택·안신영·임한영·박영준·석용원·김재준 제씨, 원문대조위원으로 지원용·윤성범·곽안전 제씨, 서기는 정용섭 목사가 수고하였다.
1970년 68세 : 대한성서공회 성경번역으로 촉탁되었다(신약 새 공동번역 완성).
1971년 69세 : 의무 봉사직 활동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대한성서공회 성경번역 촉탁을 사임하고, 재단법인 기독교방송국 이사도 사임 하였다.『진실에 산다』
공주사립영명학교 남학생기숙사
사감 안신영 교사(중앙 양복)와 1930년대 제자들 모습.
안신영 선생은 70 평생을 돌아보며,
“권리는 사람을 썩게 한다.”며 “미군정 시절 공주영명학교 우리암 교장 아들 우광복이 아놀드 군정장관의 보좌관으로 초청하였으나 거절했다.”는 것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한다.『진실에 산다』
-영명 첫 한국인 교사 자형 윤성렬과 함께-
-영명학교를 떠난 뒤에도 모교 제30주년, 제50주년 기념식에 참석-
1936년 10월 22일(一千九百三十六年一十月二十二日). 34세 :
公州永明校 卅週年紀念祝賀 十六日盛大히 擧行
참석자 尹聖烈, 金應泰, 李明濟, 玄彦東, 權益采, 柳淸鉉, 趙炳玉, 黃仁植, 劉復烈, 安信永, 黃銀植, 公州私立永明實修學校, 平壤, 京城, 天安, 禮山, 大田 외 [매일신보].
뒷줄 좌부터 안신영, 중앙 변홍규,
우 두 번째 남정관 선생님.
아래 좌측 두 번째 서덕순, 다음 조병옥, 가운데 황인식, 우측 두 번째 윤성렬 선생님(목사).
←1956년 개교50주년 귀빈 기념사진
안신영은 자서전에서 ‘평생 단 한 시간도 음악을 배운 일은 없고, 단지 감옥 마루에 건반을 그려놓고 연습한 것이 전부’라 한다. 단 여섯 살 때 공주에서 기영 형과 함께 이중창을 한 일은 있다. 천부적 재기를 타고나서인지 형 안기영과 같이 공부한 영향이 아닌가 아니면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DNA 영향인가 분명하게는 모르겠다.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부터 작사, 작곡한 작품은 셀 수 없이 많다. 또 순수한 우리찬송가 발간당시 작사, 작곡에 적극 참여하였다.
“맘에는 원이로되” 한 작품만 적시한다→
안신영(安信永) 연보
1902. 출생 : 충남 청양군 장평면 적곡리 북실(마을)에서 출생.
1906. 4-5세 :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심취.
1908. 6세 : 공주영명학교 초등과 입학.
1910. 8세 : ‘나라가 망했단다’라며 눈물짓는 선생님들을 보고 ‘대장’이 되겠다고 결심.
1912. 10세 : 공주사립영명학교 고등과 입학.
1916. 14세 : 서울 배재학당 본과 2학년 편입학.
1918. 16세 : 서울 배재학당 본과 졸업. 한글연구를 평생사업으로 결정.
1919. 17세 : 서울 3·1만세시위 참여(형 사영, 기영 동참).
: 4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입학, 4월 7일 기영 형과 헌병대로 끌려감.
: ‘독립만세 부른 것이 잘못되었다’라고 자백 강요. 기영 형은 큰형 사영 형과
신흥무관학교 간다고 사전 약속 때문에 거짓 자백하고 곤장 30대로 석방.
나는 끝까지 버티다가 미결수 4개월, 기결수 6개월 옥살이.
1923. 21세 :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졸업. 공주사립영명학교 교사 부임(영어, 역사과 담당).
“흙을 찬미한다!” 지음. 여름방학을 원주감리교회에서 봉사.
1926. 24세 : 공주영명학교 안신영 교사·김영복 교사 8월 12일 결혼.
1927. 25세 : 공주체육회발기 창립준비위원. 충남공주엡웟청년회 부회장.
1928. 26세 : 충남 공주 ‘백웅’ 창간호(흰곰이 낫네!), 제2호 발간, 백웅사.
1930. 28세 : “물렁감(홍시)” 지음.
1933. 31세 : 공주영명여학교 교감 전직(역사, 지리, 영어, 음악과 담당).
1935. 33세 : 평양정의여자고등학교 교사 취임(조선어 담당). “일곱 아내” 지음.
1936. 34세 : 평양음악협의회 상무위원 피임. 영명개교제30주년기념식 참석.
1937. 35세 : 평양경찰서 구치. 공주사립영명학교에서 조선어와 조선노래 가르친 것(무죄),
조선어 교재 발간 등 출판법위반 죄로 옭아 넣어 금고3월 집행유예2년 수형.
1939. 37세 : 서울 정동 미국 감리회 선교부 회계직 취임. 노량 동양공과학원 강사.
1941. 39세 : 향토가극 – 콩쥐 팥쥐(안신영 원작, 안기영 작곡, 서항석 구성) – 개막.
1944. 42세 : 배재고등학교 교사 취임 겸 재단법인 회계.
1944. 부모형제 모습.
1945. 43세 : 배화고등여학교 교사 취임(영어, 국어 담당).
1948. 46세 : 부친 안석호 소천.
1949. 47세 : “들국화” 지음(배화 제자들에게 준글).
1950. 48세 : 미국공보원(USIS) 주간신문 ‘세계주보’ 주필(언론인, 부산).
1951. 49세 : 부산에서 배재고등학교, 중앙고등여학교 영어, 국어, 시사해설 강사.
1952. 50세 : 기독교 간행물 ‘다락방’ 편집인 취임.
1953. 51세 : 대한 계명협회 총무 취임. 한글교육, 성인교육, 간결문학 출간. 농촌출장 지도.
“파랑새의 행복” 지음. 모친 이경애 여사 소천.
1953년 5남매 모습.
1955. 53세 : 재단법인 기독교 방송국 감사 추임. “술 한 잔의 조화” 지음.
1956. 54세 : 영명개교제50주년기념식 참석(윤성렬, 황인식, 조병옥, 서덕순, 변홍규, 남정관).
1957. 55세 : 빌리 그래함 지음, 안신영 옮김, “행복의 비결”, 백조서점.
1958. 56세 : 찬송가위원회 가사 위원장 (58-72).
1960. 58세 : “길 잃은 양” 장로교 선교부에서 영문(1954)을 국역하여 출판.
: “무엇을 믿나?” 출판.
1961. 59세 : 모교 배재중·고등학교 교장 취임.
입학생은 도의교육이 된 씩씩, 건강한 학생 환영, 특기는 인정 않음.
1962. 60세 : 배재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 감리회 총리원 사무국 총무 취임.
한국기독교 연합회(NCC) 감리회 대표위원(62-68).
수원 매향학원 감사 (62-74). 10월, 찬송가연구위원회 설치,
위원 : 마경일, 안광국, 곽안전, 안신영, 박태준, 서정태, 오영필, 엄요섭.
1963. 61세 : 대한기독교서회 운영이사(63-67). 공주영명학교 재단이사(63-68).
1964. 62세 : 감리교신학대학 감사 (64—68). 이화여자대학교 재단이사 (64-70).
수원 삼일학원 재단이사(64-72).
1965. 63세 : 재단법인 기독교 방송국 이사 취임. 대한성서공회 운영이사 (65-67).
1966. 64세 : 재단법인 은평천사원 이사장 (66-74).
1967. 65세 : 재단법인 기독교 방송국 국장대리 취임.
1970. 68세 : 대한성서공회 성경번역 촉탁(신약 새 공동번역 완성).
태화기독교사회관 운영 이사장 (70-74).
1971. 69세 : 대한성서공회 성경번역 촉탁 사임. 재단법인 기독교 방송국 이사 사임.
1972. 70세 : 웨인 앤더슨 지음, 안신영 옮김 “가정생활설계”, 새가정 8·9월호(통권 206호).
1973. 71세 : 평지낙상으로 병상에서 자서전 『진실에 산다』 유고 기술 시작.
1974. 72세 : 자서전 제2부 “인간은 우스운 존재니라” 머리말 찬술(1월 30일).
1975. 73세 : 보통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자서전을 4부로 나누어 쓰시고 편안하게 소천.
1976. : 안신영 자서전 『진실에 산다』 출간, 서울 도문사.(소천 1주기 추모)
2006. : 국가보훈처 [건국훈장 애족장 (2006)] 추서.
2015. : 공주학포럼[‘白熊’ 조명], 조동길 교수, 공주학연구원(8월 5일).
: 『향토연구』 제39집, “공주교육인물 안신영 선생” (사)충남향토연구회, 박철희.
공주영명학교개교제100주년기념기년탑
황인식, 조병옥, 유관순 좌상(애국지사 안신영 동지) 앞
안성식, 안광식, 안창식
박철희 朴哲熙
씀
1) 암천(朴增)사상연구소장, 전 대전문지중학교장, 전 영명100년사 편찬위원회부위원장.
<참고 문헌>
『진실에 산다』, 안신영 자서전, 1973.
『산초의 씨름』, “윤성렬 목사 일대기”, 윤정옥(지식산업사, 1988).
『영명』, 개교92주년교지, 이종옥(공주영명중·고등학교, 1998.12).
『한국의 근대와 공주사람들』, 지수걸(공주문화원, 1999).
『공주시지』(공주시지편찬위원회, 2002).
『충절의고장 공주지역항일독립운동사』, 박철희 윤용권 외 편저, 도서출판고구려(2007.4.13)
『영명100년사』, 영명100년사편찬위원회,(공주영명중·고등학교, 2007.6).
“공주지역항일독립운동사”, 박철희(국편 지방사료조사위원, 2007.4).
“공주의 근대 문예지 ‘백웅’에 관하여”, 공주학연구원, 조동길, 2015.08.05.
대한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소년동아일보
경향신문
국가보훈처, 독립운동 공훈록, 2006.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aks.ac.kr/aks/Default.aspx
네이버 http://www.naver.com/
다움 http://www.daum.net/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