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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5일 오전 03:42

baeksong 2016. 1. 15. 03:56


진실에 산다 (나의 생활 철학)
"내게는 한 없이 값나가는 가보는 있지만
조금도 돈 나가는 가보는 없다.
내가 전해 받은 가보도 없거니와
전해줄 돈 나가는 가보도 없다.

한 없이 값나가는 가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이요, 길이요, 빛이요, 기쁨이요,
희망이요, 위로인 성경책이다."

흰돌 안 신子 영子 아버지께서 가훈으로 자녀에게 남겨주신 글중
첫 페이지의 말씀이다.

72세인 지금의 내가 2013. 12월로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5번 읽고 느낀바가 있어
위의 아버님의 ‘진실에 산다’는 가훈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다.
6번째 성경을 대할 때는 한없이 값나가는 성경을
정성들여 다시 읽고 깨우침을 얻어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가르침인 생명이요, 길이요, 빛이요, 기쁨이요,
희망이요, 위로이며 진실에 이르는 길 안내인 알뜰한
내용을 속속들이 신, 구약 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지니고 있는 가죽 뚜껑 성경책만이 가보는 아니니까...
이 가보를 누구든지 가지도록 해라.
장식품 마냥 책장에 꽂아둘 것도 아니요, 귀중품 마냥
상자속에 잠가둘 것도 아니다.
때가 묻고 뜯어지고 해지도록 읽고 읽고 또 읽어라."

하신 말씀 따라 읽고 또 읽으니 참으로 감회로웠음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흰돌인 아버님께서는 1902년 1월 공주에서 태어나셨고
백송인 나는 1943년 5월 서울의 조계사가 있는
견지동 집에서 태어났다.
흰돌이신 엄친께서 1977년 작고 하실 때 나는 약사로서
한독약품 학술부에 근무하고 있던 34세의 나이었다.
고향이 서울이지만 공주 태생이신 아버님의 기질을
물려 받아서인지 깔끔하기를 좋아하고, 경우가 밝고,
빈틈없는 생활 습성이 대물림된 듯하여 치밀한 계획 속에
신앙 생활은 대물림 한 듯 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깍쟁이 소리는
듣지 아니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이 72세인데
아버님께서 내게 성경책을 건네 주시며 참다운 크리스쳔인이 되도록
격려의 말씀을 주셨으며 이 때가 23살 때 공군 간부 후보생 훈련
당시 대전 훈련소 김선도 목사님을 통하여 전달 받았는데
지금도 이것을 보물같이 내 장서에 보관 중이다.

"인생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처세에 대한 번뇌가 일 때,
특히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외로울 때 읽어서 해결을 얻어라.
해결을 얻을 때까지 읽어라."

이 말씀 또한 나에게는 교훈 같은 말씀이셨는데 이제야 파악되니 어찌 아버님의 자녀에 대한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도리를 깨우쳐 주심에 감사 드린다.

나는 1949년 되던 해인 7살에 종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의 남침에 의하여 초등학교 2학년 때
남쪽 지역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미국 공보관에서 근무하시는 아버님 덕택에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한민국의 최 남단에 있는 부산으로 피란가서 부산에서 5학년까지 학교를 다녔는데 이곳 저곳을 옮기는 이사를 14번 하느라 제대로 초등학교 수업을 받지 못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책상과 걸상이 없이 목에 걸치는 깔판을 책받침으로 사용하며
구구단을 외울 때가 부산 초량 초등학교 3학년 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에는 서울 수복으로 모든 식구가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내가 태어난 견지동 집은 북쪽 폭격기의 폭격으로 안채가 파괴되어 살수 없어서 우선 종로구 서린동에 있는 그 당시 갑부셨던 외할아버지 댁 사랑채에서 부산에서 출산한 외동 딸인 여동생(안 문식)을 포함하여
5명 전 식구가 단촐히 지낼 수 있었고
아버지는 나를 종로 초등학교에 전학을 시키셨다.

이 때 김학모 담임 선생이 나를 꾀 아껴 주셨다. 6학년 졸업을 종로 초등학교에서 마치고 중학교 지원 입시 시험을 통하여 배재 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견지동 집이 복구되어 중학 생활은 조계사 절이 있는 종로구 견지동에서
학교 생활에 충실할 수 있었다.


배재 중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식에서는 학부형 대표로 아버님께서 인사말을 하셨던 것이 기억나는데 아버님 역시 배재 출신(1918년)이셔서
부자지간이 배재 졸업생(1961년 76회)으로 동창생이 돤 샘이어서
항시 뿌듯한 마음 이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 수업료를 한 번도 밀리지 않고 걱정 없이 해결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에 들어갈 때에도
입학 등록금에 대한 고민은 한번도 없었음을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

성균관 약대 대학 생활 4년째인 졸업 시절에 아버님께서 배재 중고등학교 교장을 정년 퇴임 하셨는데 음력 1월 26일이신 생신날이 그 당시 달력으로는 양력 3월 1일 되어 박정희 대통령 정권 당시 1964년부터 정부에서 발표한 61세 퇴임을 사립학교에 적용되는 관례를 남기시려는 의도에서 정부 지침을 하루도 어기지 않으시고 퇴임식을 기독교 사회관에서 거행하셨다.


이미 주부들이 된 공주 영명 여 학교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인사동에 있는 기독교 사회관에서 퇴임식을 당당히 거행하시며 의연해 하셨다.
나는 약학대학을 졸업하는 4학년 말기에 국가에서 인정하여 주는 약사면허 시험 준비를 하기 위하여 학교 도서관에서 밤 늦도록 시험 준비를 하느라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가지고 다녔다.
동료 친구들과 함께 약사면허 시험 문제를 다루면서
한편 약학대학 대학원 진학 시험과
공군 간부후보생인 약제 장교 입교를 위한 임관 시험 준비라는
3중의 노력을 하였는데 남들이 자는 시간에 깨어 있어야 했고
타 대학 출신들이 학창시절을 마무리하는 여유로운 시간에
나는 전심 전력으로 하루 시간을 알뜰히 쪼개어 사용해야 했다.

다행히 1965년에 졸업과 동시 약사면허 시험 합격에 이어 약학대학 대학원 입학도 합격되었고 공군 약제관 임관시험에도 합격을 이루었다.
1965년은 나에게 천우신조의 해가 되었는데 이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부모님께서 용기를 잃지 아니하도록 뒷받침하여 주심에
감사 드린다.


교회 이야기는 초등학교 때는 어머님을 따라 세종로 성당에 다녔고,
중 고등학교와 대학 생활에서는 가회동 성당에 다녔는데
대학생일 때는 가회동 성당의 성가대와
미 팔군 합창단에서는 테너 파트를 맞아
제 1회 광복 기념 음악회를 안익태 지휘로 세종 문화회관에서
베토벤 심포니 9번 ‘대 합창곡’ 연주에 참가 하기도 했다.


아버님께선 감리교 장로셨는데  내가 어머님 품에 안겨 성당에 다닌것은 참으로 아이러칼 하지만  그것이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님께서 ‘인생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처세에 대한 번뇌가 일 때,
특히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외로울 때 읽어서 해결을 얻어라.
해결을 얻을 때까지 읽어라.
‘ 하신 말씀은 학창 시절중의 평화로운 교육자 집안의 아들로써
엄친께서 내게 틈틈히 성경을 알기 쉽고 재미나게 들려 주셨다.

더구나 배재 중고등학교에서는 교과 과목에 성경이 있어서
목사님이 성경과목 교육으로는 신구약에 대한 성경 말씀이 매주 마다 있었고
일주일에 한번 채플 시간이 있어 전교생이 모여 찬송과 예배를 드리는
특수 사목의 교과 과정이 있어서 다른 학교 학생 보다는
성경을 접 할 기회는 있었는데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는 것만을 알 뿐으로
고교 시절을  보낸것은 사실 이었다.

성경의 골자는 예수의 말씀이며.
구약은 예수의 말씀의 배경이다.
예수의 말씀은 복음( 마태, 마가, 루가, 요한)에 있고
사도행전 이하는 부록이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이 전도 활동 기록 발췌다.
그 이하는 서신이 대부분으로 이를 테면 서신 쓴 이들의 신앙 고백이요
마지막 요한 계시록은 일반 대중이 알 수 없는 글이므로
알고 싶으면 연구해야 한다.

이 말씀도 진실에 산다는 가훈 중 성경 읽기에 대한 지침이셨다.
내가 성경을 붙잡은 것은 1980년인 30대 후반 이었는데
1,2,3약국(WWW.123P.CO.KR )을 개설할 때 약국 이름을 지어 주신 마인드 컨트롤을 내게 전수하여 준 윤파로님께서 약국에 들르셔서 성경을 한번 읽어 볼 것을 권유 받아 뜻도 모르고 이해도 완벽하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구약을
1년여에 걸쳐 밤 10시 약국 퇴근 후에 하루에 15장씩 읽으면서
123약국 이란 이름의 뜻을 따른다며
새벽 1시 23분 전에는 자지 않고 무었이든지 해야 하는 목표를 세우고는
이 당시에 성경 읽기를 밤 1시 30분까지 성경 읽기를 시작한 것이다.

아버님께서 1975년 5월 25일 작고 하셨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되지 못한 것을 살아 계신 아버님께 여쭈어서 깨달음을 그 때 얻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 지금의 나의 생각이다.
아버님은 내가 고등학교 재학 중에 늘 성경을 보시면서 성경안에서의 진실된 삶을 강조하시고 사회에서 하신 일은 공동 성경 영문 번역으로 한글 성경을 읽기 쉽게 편찬하는 일과 찬송가 편찬 위원회에서
개편 찬송가를 1967년도에 만드시는데 일조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님은 감리교인 종로교회에서 찬양대를 지휘하셨고
수요 예배 때에는 설교도 하시어서 목회 활동을 하는 목사보다도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설교하셨다하여 배재 재학 시에는
동료들이 나의 아버지를 설교 잘 하시는 목사 로 여겼을 정도로
교회 일에 헌신 봉사하시는 분이셨다.
개편 찬송가 이야기를 앞서 꺼냈지만 아버님께서 1967년 개편 찬송가를 이땅에 내어놓는 이유는 이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해방과 함께 조국의 복음화를 기원하던 한국 기독교 선배 지도자들은 한 성경 한 찬송으로 일반인들에게 전도하여야겠다는 생각에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단에서 지금까지 사용하여 오던 세종류의 찬송가를 한데 뭉치어 하나를 만들기로 하고
세 찬송가 가운데에서 특이한 것은 무조건 전부를 넣고 공통된 것은 하나만 선택하여 넣는다는 원칙하에서 1949년에 합동찬송가가 발행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찬송가 관리, 수정 및 출판 문제를 위하여 항구적인 찬송가 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알선으로 1956년 초에 기독교 대한 감리회,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대한 예수회 장로회 등 세 교파에서
파송 받은 위원으로 찬송가 위원회를 조직히였다.

교회가 자라고 성숙하는 대로 합동 찬송가 개편의 필요성을 느끼어 1963년 3월 5일에 찬송가 위원회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서
파송한 각 5명의 위원과 한국 기독교 연합회 대표 1명 모두 21명의 위원과
그동안 찬송가 발행의 책임을 수행한 대한 기독교 서회 대표 1명을 옵서버로
하여 일을 추진하였는데 위원장에 강신명 목사가 가사위원장에 안신영장로인 나의 엄친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1967년 합동 찬송가 편찬 시에 아버님께서 지으신 작곡이 2편 작사곡이 1편이
개편 찬송가에 실렸는데 이천진목사가 발간한
'찬송가 이야기‘에 위의 내용이 자세히 실려있다.

"나는 예수의 말씀을 골라서 애독하는 버릇을 가졌다. 쉽고도 넒고 깊다."
아버님은 1953년 내가 10살일때 대한계명협회 총무로 취임하시고 한글교육에 뜻을 두시고 문맹 퇴치에 앞장선 생활을 실천하셨고 박정희대통령 시절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4H 구락부의 농촌계명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때 간결문학 필체로 50편의 서적을 출판하셔서
직접 농촌 출장 지도를 하셨음을 곁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농촌 사람들이 한글을 익히지 못하여
글을 읽지 못함을 아시고 소책자로 농촌에 배부한 한글맞춤법이 있었고
온 세상에 이미 알려진 우리나라의 인물과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간결한 문체로 작성하여 알쉽고 배우기 쉽게 출판하여
1961년 계명협회 총무를 사임하실 때 텔레비전에 나오셔서
10년 전에는 농촌의 문맹자가 70%였는데
10년이 지난 1960년대에는 우리나라 농촌의 문맹자가
거의 없어졌다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난다.

"“진실에 산다” = 이 가훈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이 아니라 내가 세운 가훈이다. 이것이 가훈 이니까 너희들은 이 가훈대로 살아야 한다고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들 나름대로 가훈을 세워라.
나와 공명하거든 이 가훈을 계승해도 좋다.
이 가훈의 토대는 성경 말씀이다. 풀이는 나중에 하겠다.""

아버님쎄서 1975년 5월 25일 하느님품으로 돌아가시고 탄현에 있는 기독교탄현묘원에 묻히셨을 때 우리 자녀들은 무덤에 잔디로 봉분을 세우는 대신 대리석으로 무덤 전체를 덮고 대리석위에
아버님께서 가훈으로 남겨주신 "진실에 산다"라는 글씨를 음각으로 새겨 넣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