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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2일 오전 10:15

baeksong 2015. 8. 12. 10:40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나의 자랑스러운 아버지

 안子 신영(安子 信永)의  독립 유공자를 다시한번 기려 봅니다

 

    아래의 글은 공주영명 출신으로 대전 문지 중학교 교장을 지내신 바 있는

    박철희 교장 선생님께서 보내 주신 흠모글 입니다.

 

『진실(眞實)에 산다』,

 안신영(安信永) 선생님을 흠모(欽慕)하며


-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영명(永明)의 횃불, 독실한 크리스천, 영원한 스승님 -

☐ 선각자인 한글학자 안신영(安信永) 선생님

흰돌 안신영(安信永) 선생님은 성리학자 문성공 안향(安珦=安裕)의 후손으로 충청도 중앙에 위치한 청양 칠갑산 정기를 받고 정산 북실마을 크리스천 가정에 태어나서 흰돌처럼 청아(淸雅)하게 살고자 하였다.

부친 안석호(安奭鎬) 선생님과 모친 이경애(李敬愛) 여사님 사이에서 네 번째로 태어나신 셋째 아들이다. 일제강점기 불운한 때를 만나서 호랑이 같은 대장부 거인의 의기(意氣)가 관철되지 아니하니, 고난을 겪으면서도 독실(篤實)한 신앙심을 바탕(진실)으로 셋 셋 생활원칙을 세워놓고 정진하셨다. 즉 첫째 셋, ‘사람(對人)·일(對事)·물건(對物)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되, 둘째 셋, ‘바르게·부지런하게·검소하게’, 셋째 셋, ‘약속준수·봉사생활·웃으며(밝게) 살 자’를 목표로 정하고 올곧게 사신 분이다.

흰돌 선생님의 『진실(眞實)에 산다』를 봉독하면서 남다르게 감명을 받은 것은 ‘나의 유산’항목에서, 자녀들에게 남겨놓은 것은 금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정신 즉 무형유산(영혼, 마음, 양심)이고, ‘아호 흰돌’항목에서는 순결하며 깨끗한 돌(인생)이라 이르셨고, ‘나의 직함을 호칭’할 때는 장로보다는 ‘안신영 선생(님)’이 제일 좋고, 적합하다고 겸손해하셨기 때문에 이 글에도 그렇게 호칭합니다.

1부는 ‘진실에 산다’ 자녀들에게 주는 40여항,

 2부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25항,

3부에 80여 편의 성경말씀,

4부 생각나는 대로에 70여 항 등 주옥같은 말씀이 한없이 펼쳐지는데, 한 두 마디로 옮길 수가 없다. 즉 365쪽을 단번에 독파할 수가 없어서 두고두고 한두 쪽씩 정독하여야겠다.

흰돌 선생님은 확고한 종교철학, 항일애국사상, 농촌계몽운동, 국어(한글)·국사사랑, 자주·자립정신, 남녀평등·평화사상, 봉사정신, 용서(容恕)의 삶 등 자신의 건강을 잃을 정도로 인고(忍苦)를 다하며 제자들에게 인간답게 살도록 희망을 북돋아 주신 진실(眞實)한 삶을 사셨던 보기 드문 선각자(先覺者)이었기에 나이 먹은 제가 때 늦었지만 사숙(私淑)하고 싶은 숭모(崇慕) 대상 중의 한분이다. 특히 ‘한글맞춤법’을 수십 명의 전문 학자들 못지않게 홀로 연구하여 발표하셨다. 주시경 선생의 뒤를 이어 평생 한글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은 한글학자이다.


☐ 영명이 낳은 독립운동가 안신영 선생님

3·1항일독립운동과 한글교육 때문에 서울 서대문 형무소와 평양 형무소에서 두 번의 옥고를 겪으며 이 민족의 미래는 2세 교육에 있음을 간파하고 후학 양성에 몸 받쳐 오신 흰돌 안신영(安信永, 1902~1975) 선생님은 영명(永明)의 영원한 스승·선배이시다.

선생님께서는 1908년 4월 공주로 이사하여 공주영명학교 소학과에 입학하고 애국지사 김관회(金寬會, 공주4·1항일만세 주도), 이규갑(李奎甲, 건국훈장 독립장) 스승 등에게 애국사상을 전수 받았고, 1916년 3월(당시 류관순(柳寬順, 건국훈장 독립장) 열사도 영명여학교 보통과 2학년 수료 후 이화학당 전학) 고등과 2학년[친구 정환범(鄭桓範, 건국훈장 애국장), 이정방(李鼎邦, 李約翰, 건국훈장 애국장) 외 역시 선배 이규남(李奎南, 대통령표창), 신현창(申鉉彰, 건국훈장 애국장), 대선배 조병옥(趙炳玉, 건국훈장 독립장) 등 동문수학]으로 전학가기 전까지 8년여를 영명에서 애국지사인 스승과 선후배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애국사상을 다지고 항일의식을 체득하셨다.

뿐만 아니라 부친 안석호(安奭鎬, 기독교애국좌담회, 항일 유공) 선생님께서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셨고, 장형 안사영(安思永, 만주 노령, 불령선인상황(독립단), 신흥무관학교 고등군사반 의무감, 항일 유공)은 영명졸업 후 세브란스의과에 진학, 중형 안기영(安基永, 조선혁명간부학교(軍官學校) 3기졸업자, 3·1운동 유공)은 영명에 재학, 동생 안시영(安時永, 국내 항일, 수형인명부), 안순영(安淳永, 임정 중국, 조선혁명간부학교(軍官學校) 3기졸업자, 관동지방법원 옥고2년), 자형 윤성렬(尹聲烈)과 매부 이광연(李光然) 선생도 서로 시기는 다르지만 영명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등 9남매가 대부분 영명학교와 항일독립운동에 관련된다.


서울로 이사하여 중형 안기영이 재학한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18년 연희전문학교 문학과에 입학 한다. 이듬해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로 인하여 1923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늦게 졸업, 그 해 1월 1일에 모교 공주영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와 역사를 담당하셨다. 당시 동경2·8독립선언을 주도한 선배 독립운동가 윤창석(尹昌錫)과 같이 근무하였다.

공주영명학교에서 1923년 9월 야학 영어강습회에 연령 제한을 두지 않아서 인지 지원자가 넘쳐서 정원을 초과 달성할 때 당시의 강사는 사애리시(여학교교장, 유관순 열사 양모), 윤창석(건국훈장 애국장), 안신영(건국훈장 애족장) 이었다.

1933년 공주영명학교가 실업학교로 바뀌면서 그 해 4월 1일 영명여학교(중고등) 교감으로 전임(轉任)되어 역사, 지리, 영어를 담당(전부터 영어, 음악을 교수)하였다.

국가보훈처는 제67회 순국선열의 날(2006.11.17일)을 맞아 안신영 선생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공훈록 :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하고 학교 졸업 후 평양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체포되어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안신영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대한문(大漢門) 등지에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 1919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 1919년 8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3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 1935년 4월 평양(平壤)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正義女子高等普通學校) 교사로서 창가집 및 한글독본을 출판하여 민족교육을 하였다. 이로 인해 안신영은 다시 체포되어 1938년 7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3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判決文(光州地方法院:1919. 6. 13)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6. 23) ·判決文(高等法院:1919. 8. 12)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犯罪人名簿(西大門區) ·東亞日報(1938. 5. 20)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권 232~233면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17권 190면 ·진실에 산다(안신영, 1976) 34~36면.]

이렇게 늦게 현창되어 미안한 일이었으나 그나마도 다행이다.

반면 그의 부친 안석호(항일운동 유공 미지정) 선생님과 장형 안사영[박도(parkdo45) 기자, 실록소설 '들꽃' (22) 제5장 망명생활의 시작 ④/ 오늘도밝음 (yongah7) “독립전사의 산실” /남쪽나라 (okinawapark), “독립전사의 산실”/ 직삼각형 (smallnews) “독립전사의 산실” 네이버 블로그에서 인용.] 애국지사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 고등군사반의 초대 학장에는 이시영, 교장 이세영, 부교장 양규열, 학감 윤기섭, 훈련감 김창환, 교성대장 이청천, 교관 오광선·신팔균·이범석·김광서·성준용·원병상·박장섭·김성로·계용보, 의무감 안사영(항일운동 유공 미지정)요’ 또 중형 안기영(학생으로 3·1운동, 조선혁명간부학교(軍官學校) 3기생 수료 유공 미지정), 동생 안순영(安淳永, 이명 方天民, 1935년 10월 5일 조선혁명간부학교(軍官學校) 또는 황포군관학교3기 수료, 대련에서 피검(1936.05.15. 징역2년. 관동지방법원) 유공 미지정) 선생 등은 아직도 묻혀 있다.

그리고 공주영명학교 최고의 애국지사 김관회(金寬會, 공주4·1항일만세 주도)를 비롯하여 20여명도 묻혀 있으나 이 숭고한 항일애국 정신을 밝혀 선양하지도 못하는 나약한 후배들은 미안하기 그지없다. 국가에서라도 안 된다고 거절하지 말고 그 후손이 살았을 때 힘써 공적을 찾아서 밝혀주기를 제안한다.

☐ 특별활동 도입으로 영명의 이름을 떨치신 선생님

안신영 선생님은 8년 동안 재학하였고, 1923부터 1935까지 12년 동안 영명학교 교사 재직 시절에 종교, 농촌 계몽, 음악, 스포츠, 문예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학생들과 함께 그 시대의 개척자로서 영명학교의 이름을 빛내고, 모교 발전을 위하여 젊음을 불사르며 혼신(渾身)을 다 바치신 분이다.

선생님의 교육철학은 무슨 과목을 가르치던지 정신교육에 치중하여 민족사상을 심어주었고, 민주주의 교육에도 철저하여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였으나 수업시간은 엄격하였고, 과외활동에는 부형이나 친구처럼 함께 즐겼다.

 

안신영 선생님의 자서전 진실에 산다에 의하면,

“1923년 영명학교에 부임한지 한 달쯤 지나 5월에 영명남녀학교 연합대운동회가 공주산성운동장에서 열렸다. 운동회 순서 가운데 절정이 남녀학교 교사들 500미터 경주였다. 그런데 늘 여학교 선생님들이 이겼는데 내가 부임하고 우리 남학교 선생들이 1, 2등을 차지하여 남학생들의 환호 소리가 공주산성을 뒤흔들었다. 이것이 학생들의 환영을 받은 나의 첫 기록이요 그것이 노년기까지 상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1929년에 나는 학생들과 함께 자전거 부대를 조직해 갑사 단풍 구경에 나섰다. 계룡산 갑사는 가을 단풍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15명 일행이 자전거를 타고 40리 길을 왕래한다는 것은 볼만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착실한 기독교인인데 공주영명에서 교편생활 중 공주감리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를 책임졌고, 공주 주위 촌락을 찾아가 야학운동을 전개하고 영명학교 학생들을 지도하여 주경야독하게 했다.”

 

영명학교 시절에 1년에 한 번씩 내가 지도하는 뮤직 클럽을 중심으로 공주에서 음악회를 열었고 원근 지역에 초청을 받아 부여, 논산, 강경, 군산, 대전, 예산, 천안 등지로 순회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안신영 선생님은 또한,

 교사 시절에 영명 팀 선수, 공주 대표 팀의 선수로 야구, 축구, 정구에 활약 했고, 방학 중 공주 팀을 인솔하고 대전, 천안, 논산, 강경, 군산, 예산 등지로 원정도 하고 지역 대회를 열기도 했다. 공주서 영명학교 팀과 공주고보 팀과의 야구 결전은 큰 화제였는데 마치도 한국 대 일본과의 결전 같았다. 고보 팀에는 일본인 선생이 많았고 영명 팀에서는 내가 피쳐를, 아멘트 교장 대리가 캐쳐를 보았는데 영명 팀이 늘 우세했다.”

 

한편 안신영 선생님은 충절의 고장이라 일컫던 충청도 공주영명에서 공교육에 최초로 특별활동 커리큘럼을 도입하시고 그 활성화의 일환으로 여학교에 테니스 부를 창단하여 직접 지도하셨으며 서울 등지로 원정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영명”(永明)의 이름을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떨치신 분이다. 영명100년사에도 기록되었듯이 선생님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1931924일 제7회 전국조선여자정구대회에 연식 정구부를 이끌고 참가하여 3연패를 기록하였고, 이 당시 호순애·안국희가 우승을 하였는데 호순애’(扈順愛)가 선생님의 애제자였다. 호순애와 동학년으로 영명여학교 고등과를 같이 졸업한 전(全密羅) 역시 선생님의 제자로 한국 최초의 여목사로 안수 받았음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학문과 예술에 천부적인 재기(才氣)로 재기(才器)를 발휘한 선생

 

선생님은 당대의 저명한 문학자(文學者)요 예술가이셨다. 선생님은 문필과 예술의 질을 타고 나셨던 것 같다. 1920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서 공모한 교가응모에 당선되었고(이화여자대학교 교가 : 정인보 작사, 안기영 메리영(안신영 선생님의 형) 작곡), 공주영명학교 재직 시에는 기독신보에서 현상 공모한 단편소설에서 농촌을 소재로 한 오늘의 모세로 입상되어 연재되기도 했다.

선생님은 192821일 공주에서 순문학동인지 백웅 [白熊]을 초판하고 문학 활동도 하였다.

19361028일 평양음악협회의 발회식이 평양부(平壤府 和信食堂)에서 거행된 평양음악협회 위원과 회원명부에 29명 중 두 번째로 등장한다. 194147일 매일신보 44소녀가요제-콩쥐 팥쥐’- 안신영 원작, 서항석 구성[安信永(原作), 徐恒錫(構成)]으로 개최되었다.

 

부언하면 부친은 양금, 거문고를 잘 타셨고, 중형 기영과 아우 순영은 음악을 전공하여 이름을 날렸으며, 9남매의 자녀(서울대와 러시아를 거쳐 미국 예일대 음대 초빙 객원 연구원 손녀 안미현 피아니스트)와 외손(소프라노 가수 김영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KBS 화해 방영)까지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음악가도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 한글맞춤법, 영문법 강해, 알기 쉬운 영작문, 행복의 비결, 무엇을 믿나, 통상회의법(通常會議法, 大韓基督敎書會, 1950, 제주우당도서관, K061-59) 등 다수의 논설문과 번역문을 기고하시어 신문화 창달에 앞장섰다.

특히 선생님은 남달리 의지와 연구심이 강하여 옥중에서도 차디찬 감방 마루에 오르간 건반을 그려놓고 혼자서 화음 연구를 거듭하여 출옥 후에 창내 교회에서 찬송가를 연주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음악뿐만 아니라 필수 교과 이외에 스포츠나 연극, 글짓기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모든 교과를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이었다. 공주발전을 위하여 공주체육회발기(동아일보 1929.03.21.)에 규약기초위원, 창립총회준비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심지어 동아일보 19364143면 기사에 의하면 평양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근가시는 송별연에 대하여 공주읍 공제의원(선배 양재순 애국지사)에서 회의한 결과 흰돌 성생님은 공주의 음악과 체육발전에 공로가 있으니, 송별음악회와 송별축구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독실한 신앙심으로 혼탁한 사회에 소금과 빛이 되신 선생

 

자서전 진실에 산다2부에는 인간은 우스운 존재니라25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인간으로 살면서 소감을 옮기셨다. 또 제3부에서는 믿음에 바탕이 된 성경말씀 중에 금과옥조(金科玉條)에 해당되는 80편을 모아 평전을 곁 드려 읽는 이들에게 보탬이 되도록 글을 남기셨다. 자서전 전체가 교회에서 들을 수 없는 설교집이다. 비신자도 읽으면 삶에 크게 도움이 될 명언집이다.

 

광복 전후의 혼란기와 6·25한국전쟁 이후 근대화의 몸부림을 치던 1970년대 까지 선생님은 교육계와 종교계 그리고 언론에서 소금과 빛으로 그 소임을 다 하신 분이시다.

1939년 서울 노량진에 있는 동양공과학원 야간부 영어 강사를 비롯하여 1944년 배재고등학교 교사, 1945년 배화고등여학교 교사, 1949년 감리교 신학교 교사를 역임하셨다. 6·25가 발발하자 피난지 부산에서는 배재고등학교와 중앙고등여학교 영어 교사로 봉직하였으며, 1961년에는 성품이 행정을 싫어 하셨지만 모교 교장을 추천받아 거절하지 못하고 숙고한 끝에 배재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셨다가 60세 정년제에 따라 그 곳에서 교원40 정년을 하셨다.

 

선생님이 19506·25한국전쟁 중에는 미국공보원(USIS)의 주간신문인 세계주보의 주필이었고, 1952년에는 기독교 간행물 다락방의 편집인을 거쳐 1953년에는 계명협회(啓明協會) 총무로 한글 교육과 성인교육, 간결문학(簡潔文學)의 소책자 발간하였고 1954년에는 기독청년 활동의 일환으로 모이면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좋은 노래집을 만들어 배포하였는데, 이 노래 곡 중에 널리 알려진 목장 길 따라 밤길 거닐어가 안신영의 번역곡이며 그 후 기독청년단체의 요구에 의하여 1959년에는 145곡이 들어있는 즐거운 노래책을 발간하여 호평을 받았다. 계명협회에서 발행한 소책자와 기독청년활동의 노래책으로 농촌계몽지도를 한 때가 우리나라 4H구락부 청년활동과 맞물려 우리나라 농촌의 문맹퇴치에 일익을 담당하는 등 사회계도(社會啓導) 활동에 헌신한바 크셨다.

 

뿐만 아니라 종교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우신 분이다.

19627월부터는 감리회총리원(監理會總理院) 사무국 총무로 봉직하다가 19696월부터는 기독교방송국 국장대리로, 197011월에는 대한성서공회 성경번역 촉탁으로 종교 활동에 헌신 기여 하셨다. 1967년에는 기독교 공동 새찬송가에 안신영 작곡이 2곡이나 실렸던 것은 성서주해출판위원회위원(1962~1975)으로 다년간 활동 하셨고 찬송가 가사위원회 가사(歌詞)위원장(1958~1972)으로 교역 봉사하실 때였다.

 

이외에도 공적 선거에 의하여 보수 없이 의무 봉직하신 과업도 적지 않다.

학교법인영명학원 재단이사를 비롯하여,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수원 삼일학원학교법인 재단이사, 수원매향학원학교법인 감사, 감리교신학대학 재단감사, 태화기독교사회관 운영이시장, 재단법인 천사원이사장, 성서주해(聖書註解)출판위원회 위원, 재단법인기독교방송 감사 및 이사, 한국기독교연합회감리회(NCC) 대표위원, 대한성서공회 운영이사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하여 소금과 빛의 소임을 다하신 분이다.

 

제가 흰돌 선생님에 대하여 몰라도 너무 몰랐다. 빙산의 일각 즉, 환자가 왜 아픈지 원인도 찾지 못하는 돌파리의사격으로 이 글에 손을 댄 것을 깊이 뉘우치게 되었으나 이미 언약을 하였으니 큰 죄를 짓는 셈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은 흰돌 선생님의 자서전 진실에 산다를 구해서 직접 봉독해 보시기를 추천한다.

 

끝으로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흰돌 안신영(安信永) 선생님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이웃을 존중하고, 한글학자요 나라를 지켜 낸 현인(賢人)들이 말하는 달존(達尊)에 이르신 인물이다. 감히 정중히 엎드려 아뢰나이다.

~!

흰돌 안신영 선생님!

공주영명의 횃불이요, 달존에 이르신 영원한 스승님!

공주영명학원이 기독교 성지로 찬란히 빛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옵소서!

 

 

永明100年史 편찬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지방사료조사위원 역임,

현 충남향토사연구회회원, 암천(朴增)사상연구소소장 朴哲熙 삼가 하다

 

<참고 문헌> : 흰돌 안신영, 진실에 산다, 1976.5.25.

박철희, 윤용권 외, 공주지역항일독립운동사, 2007.4.13.

영명100년사편찬위원회, 永明100年史, 2007.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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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 우선 제가 글에 재주가 없고, 또 흰돌 선생님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하여 그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가 없어 죄 짖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그러나 간곡하신 말씀을 뿌리칠 수가 없어서 대략 위와 같이 어설피 수정하였습니다. 혹 빠지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첨가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세밀히 살펴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조부 이하 여러 가족이 항일독립 유공자이신데 자세히 알지 못하여 여기에는 성함만 올리고, 논하지 못하였습니다. 용서 바랍니다.

박철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