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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악 소책자 번역문 마감 글

baeksong 2012. 7. 11. 16:06

에시악 소책자 번역문 마감 글

러네이의 투쟁은 끝났다

테드 브리튼

지난 금요일 11시에 성 요셉 천주교회에서 러네이 케이시를 위한 진혼 미사가 열렸다. 케이시 간호사는 12월 26일 남부 무스코카 메모리알 병원에서 소천했다, 5주전, 히람가의 자택에서 넘어져 다리에 골절이 되었는데 회복을 못했다.

소천 할 때, 러네이는 91세로, 에시악 (케이시를 꺼구로씀), 의 개발자로 수 많은 사람들이 암을 치료하는데 긍정적인 효과를 보게해서 전문 경력중 정상에 도달했었다.

노스베이의 변호사며 에시악으로 도움을받은 많은 사람중의 하나인 찰스 멕거이히와 잠시 결혼했었지만, 케이시 간호사는 평생 결혼전의 성을 썼다. 러네이는 11명의 자녀중 딸 8중의 하나였고, 요셉과 프리셀디 케이시사이에 태어난 3째 딸이다.

케이시가는 피터보로우에서 브레이스-브리지로 , 1800 년 말기에 무스코카 지역에 기차 조차도 들어오기전에 이주했다. 연초상인, 요셉은 60세에 돌아갔고, 침모, 여자 모자 제조인인 프리셀디는 90세까지 살았다.

참으로, 프리셀디 케이시는 72세에 , 간암이 발견된다음에, 에시악 치료를 받았다. 멕기븐 박사는, 러네이가 늘 말했듯이, 그녀의 일에 반대를 했었는데, 모친의 병에 대해서 뭘해 보라고 도전을 했다. 10일간의 치료로 프리셀디는 회복하기 시작했고, 실은, 18년을 더 살았다.

러네이는 일생을 간호직을위해 바쳤다. 그녀의 생애 초년에 암치료법을 알게되어 그것이 일생을 지배하게 되었다.

1922년 온타리오, 헤이리베리에서 러네이는 처음, 암을 치료할수있다고 믿는 생약차를 알게된다.

그보다 일찍 자신의 위방암을 완치했던 노인 여자 한분이 러네이에게 인디안들이 사용했던 생약의 처방을 주었다.

그후 수 년동안, 러네이는 그 처방을 개량하고, 쥐와 실험을 해서 결국은 완제품을 암환자를 치료하는데에 사용했다.

브레이스브리지 케이시 간호사의 진료소 에서 수백명이 에시악 치료를 받았다, 1930 년대 말에, 의료계가 그것을 암 치료제로 인정하도록 하려는 대중의 압력이 많았다.

지방정부의 암 위원회가 1938년에 결성됐다. 1939년 그들은 암치료에 에시악의 효과가 오직 제한된 것 이라는 보고서를 제출됐다. 위원회는 그것이 암치료제라는것을 인정하기를 거절했고 더이상 실험을 허락하기전에 생약 차의 성분명을 알리라고 요구했다.

케이시 간호사는 에시악 처방의 공개를 거절했고, 계속 그러다가 작년초에 레스피린회사에게 처방을 넘겼다. 암사회와 전반적인 의료계에대한 긴 투쟁중, 만일 케이시 양이 처방을 기성 의료계에 건네 줬다면, 그녀의 암요법은 영원히 선반에 얹어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1977년에 실시된 실험에서, 온타리오의 두 의사는 40명의 각종 말기암환자를 치료하는데, 에시악이 거의 완전히 무요지물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케이시 간호사는 그 실험이 의료계가 그녀를 망신시킬려는 또하나의 시도라고 무시하고,그후에 자기의 처방을 레스피린회사에 넘겼다, 이회사는 우라니움광업계의 거물인 토론토의 스테픈 로만이 대표였다.

레스피린은 케이시 간호사에게 실험기간중 매주 250불, 그리고 이 치료제가 시장에 나오게 되면, 이윤의 지분을 지불하기로 동의했다.

지난 50년간, 백만불의 제의를 포함해서, 그녀의 처방을 사겠다는 제공 액들과 비교 할 때, 레스피린의 지불액은 결코 후한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케이시 간호사는 누구엔가 에게 처방을 전해주어야할 시간이 도래했다고 믿고, 레스피린이 에시악을 암 치료제로 승인을 받을수있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마감 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