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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악 관련 번역 시리즈 7

baeksong 2012. 6. 29. 11:16

제 6 부:

" 바스테도와 브래이스브리지 박사는 에시악을 믿었다"

내가 처음으로 한 그 약물 주사를 잘 기억하고 있다.

알.오. 피셔박사가 불러서, 뉴욕주, 라이언즈에서 온 목과 혀의 암환자의 혀에 주사를 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심한 오한에다 혀가 왕창 부어서, 환자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의사가 혀를 눌르는 등, 격렬한 부작용이 날 때는 두려워서 죽는 줄 알있다. 이렇게 20분이 지나자, 부기는 내리고, 오한도 좋아져서 환자는 괜찮았다. 실은 암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았고, 환자는 귀가해서 무통으로 거의 4년을 살았다.

그 때, 성분을 한 가지 제거하고, 또 하나를 더 빼서, 악성 종양의 증식을 중단시키고, 부작용 없는 근육주사를 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증식된 암세포가 파괴 될 때, 피를 정화하기 위해 또 다른 성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주사와 경구용 약을 투여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는것이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경구용 약제만 쓸때보다 더 빠른 결과가 있었다.

의사들이 자기들의 환자를 내 아파트로 보내기 시작해서, 하루에 30명쯤 됐다.

내가 살고있던 아파트의 딴 주민들이 반대를 해서, 나는 포기하고 도시를 떠나야만 했다. 어떻튼, 나는 수가를 받지 않아, 거기서 계속할 능력이 없어, 피터보로에가서 집을 세 들었다. 이사하자 마자, 의과대학은 체포 영장을 건내려 경찰을 보냈다.

이 경찰은 나에게 "난 이 체포 영장을 않 건낼거야.

원장인 노블박사한테 가서 말할꺼야" 라고 말했다.

나는 그를 다시보지 못했다. 그 다음날 보건 장관인, 롭박사에게 청문회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다음 주 월요일에 청문회를 허락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한테 환자들을 보낸 의사들을 연락했다. 의사 5분과 환자 12 명이 나와 같이 왔다.

우리들은 퀸스파크에서 롭박사, 차관인 비.티.막기 박사와 국립보건복지부의 커닝함 박사로부터 정중한 접견을 받았다.

나의 실정을 설명한 다음, 롭박사는 내가 일을 계속 할 수 있되, 환자가 의사의 진단서를 나한테 가지고 와야 하고, 수가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방해를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에시악" 치료의 장점을 증명해서 의사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개인 연구원이 됐고, 나의 용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자랑스럽고, 행복한 심정으로 다시 시작 한다는 마음이었고, 반대에 부딕 칠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며칠후, 나한테 장암환자를 보냈던, 브레이스- 브리지의 알버트 바스테도박사한데서 전화가왔다. 바스테도박사는 이 환자의 치료 결과에 감명을 받아, 브레이스브리지 시의회에가서 올드 브리티쉬호텔을,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 일을 할 수 있도록, 진료소로 쓰게 해 달라고 설득을 했단다.

그는 내가 이 제안을 받아 들이도록 종용했다. 시장과 시의회는 매우 열성적이었고, 그들의 도움과, 친구들, 친척들과 환자들이 도와, 사무실, 약국, 대기실과 치료실 5개를 꾸몄다. 나는 여기서 거의 8년을 "암 진료소" 간판을 문에 걸고 일했다.

의사들은 환자를 보내거나 직접 나한테 데리고 왔다. 미국 전역으로부터 의사들이 환자를 검진하고, 그 결과를 지켜보고, 내 치료법을 관찰하기위해서 왔다.

환자들이 멀리서 구급차에 실려왔으나, 몇 차례 치료를 받은 다음 부터는 본인이 직접 걸어서 병원에 올 수 있었다. 환자는 먼곳 가까운곳에서 왔다.

여기서 거의 8 년간, 의학으로 모두가 실패해서, 절망적이라고 포기한 수 천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나는 암사회가 요구하는 데로, 각종 암에 효력을 충분히 증명해 놓으면, 그들이 암 치료용으로 "에시악" 을 기꺼이 받아 드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 암의 완치법을 발견되지 못하게 하려는 조직적인 방해가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이즈음, 나는 진단서를 주는 의사들이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환자들이 의사의 진단서 없이 우리 병원에 오곤했다, 나는 의사진단서가 있는 환자만 치료하도록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돌려 보내야만 했었다.

환자들은 치료를 해달라고 간청을 했고, 분명코 가정의를 압박해서 억지로 진단서를 받아 냈을 것이다. 때론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었다. 가끔, 방문하는 의사가 환자를 검진하고 불쌍해서 진단서를 써주었다.

내 일에 관해 알고 있는 시카고 사람들이, 시카고 동창회, 서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죤 울퍼박사를 설득해서 내가 그들의 병원에서 의사들의 주시하에 환자를 치료하도록 했다.

비 박사(자문 전문가)는 울프박사한테 날 데려다주었다. 내가 치료 해야 할 모든 희망없는 환자들의 병력을 읽었다. 나는 그들을 쳐다보고 " 박사님, 언제 시작할까요? " 라고 물었다.

그는 놀란 표정이었다,

왜냐면 내가 거절 할 줄 로 예상했기 때문이다(나중에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내가 시카고에 남아 매주 목요일에 5 명의 의사의 관찰하에 이들 환자를 치료하기로 결정을 봤다.

내 친구집에 돌아가는 길에 비 박사가 내가 왜 이렇게 힘드는 일을 맡았는지 물었다.

"말기암이지만 좋은 결과를 보여 그들을 놀라게 할래요. 제일 불신하는 의사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 할 만큼이요. " 라고 말했다.

실은 그렇게 했다. 나중에 그들은, 만일 내가 시카고에 남아있는다면, 시카고 파사반트 병원에서 암진료실을 개설하도록 제안을 했다.

6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