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나를 이해하기 쉽도록 내가 자란 배경 얘기를 해야겠다. 우리 선조들은 1700년대에 프랑스로부터 이 나라에 와서 퀘벡의 세인트 아가트에 정착했다.
케이시쪽 가족은 빠리의 교외에서 왔다. 그들의 휘장은 용이었고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내 어머니의 선조는 농부였다. 그들은 퀘벡의 라 프레어리 근방에있는 농장에 정주했다.
나중에 모두들 카나다, 온타리오주, 피터브러로 이사를해서, 거기서 내 아버지는 여자 재봉사였던 내 엄마를 만나 사랑에 빠져, 피터브러에서 결혼 한 다음, 브레이스브리지 마을로 이사를 했다.
이 지역에 기차가 들어오기 전이라, 기차 길 끝에서 부터는 배를 타고 왔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나를 포함해 딸 여덟, 아들 셋을 낳아 대가족이 됐다. 우리들은 사랑과 신의 경외속에 자랐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때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런다.
엄마는 늘 딸 여덟을 아들 하나하고 기꺼이 바꾸겠다고 농담을 하시곤 했지만, 그녀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고, 우리 가족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 잘 안다. 아버지는 당신과 내 오빠가 쓸 점포하고 언니둘이 쓸 전포를 지으셨는데, 언니들은 여자용 모자 제조인이 됐다.
아버지는 60세에 소천하셨다. 어머니는 구십세 생일을 보시고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만인의 사랑을 받았다.
대가족이면서도 항상 시간을 내서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녀가 한 교회 일의 답례로 카나다, 온타리오, 브레이스브리지에 있는 세인트 요셉교회에 그녀 이름으로 된 그림 창이 하나있다.
어머니는 세계대전 중 적십자 자원봉사를 해서 적십자 명예회원증을 받으셨다. 그녀는 수년간 여성 연구소의 소장이었고, 잠시도 손을 놀리지 않았다.
브레이스브리지 신문은 그녀의 90세 생신날 이런 기사를 실었다. " 토요일에 90세가됐고, 자녀가 11명, 손주가 16명, 증손주가 15명, 현손이 1명, 이것이 프리셀드 케이시부인의 자랑스러운 기록이다.
그리고 여기 사랑의 기록이 있다. 그녀에겐 자식들이 자랑 꺼리다. 지난해, 나이 때문에 활동이 더디어 지기 전까지, 늘 자식중의 하나와 같이 살았다. 케이시 부인은 평등 권리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최특권자의 권리를 받아드렸다. 이제 여기에 축하하는 뜻으로 운을 띄어 시를 지어봤다:
" 90세가 되니 얼마나 좋으실까!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고, 즐거움을 보고,
흥겨움을보고, 일들을 보고,
때론 울때도 있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으니
서두르지 않고, 두려움 없이,
나날들이 달콤했던 지난 날들 보다 더 감미롭기를 빕니다. "
내가 속한 가족들은 이런 분 들이었다. 우리 가정은 행복한 기독교 집안으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재산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에시악 치료의 수가를 받지 않았고, 결국은 법정에서 내 권리를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그래서, 의과 대학측에서 경찰을 보내 수차례 체포와 투옥의 협박을 해와서, 불공평한 싸움을 포기하고, 암환자의 치료를 중단 했다.
이제, 돌아가신 모세스 할머니처럼, 나는그림을 그렸다.
수많은 유화를 그리면서 잊을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잊을려고 노력을 했다. 내가 암의 완치방법을 알고있고, 세계가 그렇게 절실히 원하는 그것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누구에게 전수하던 간에, 내가 한 위대한 과학자에게 전수했을 때 처럼, 그가 믿음의 용기가 있다면, 그는 힘도 못쓰고, 망신을 당하여, 내가 받았던 지옥같은 대접을 똑같이 받게 될것이다.
1부 끝